몇분의 반박이 있기는 했지만, 글을 쓰면서 예상했던 것보다는 반대 의견이 의외로 적군요.
몇시간 동안 웬만한 언론사들의 관련 기사들과 네티즌들의 글들을 뒤져봤습니다.
언론사들의 게시판들, 의견쓰기란 등에는 강경론과 반대론이 마구 뒤엉켜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보면 볼수록 답답한 마음 뿐입니다.
강경대처를 주장하시는 분들께, 그분들이 무시하시고 있는 가장 중요한 한가지를 짚고 싶습니다.
아마도 강경하게 북한을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다른 분들이 강경대처에
반대한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MBC, 한겨레, 오마이뉴스 등에서 주장하는 것은(물론 저도 포함하여), 국방부의 발표에는 의혹이
있으며, 그런만큼 사태의 진상을 파악한 다음에 강경하게 대처해도 늦지 않다는 것입니다.
서해교전에 대해 우리 국민이 알고 있는 정보는 모두 국방부에서 발표한 것 뿐입니다.
문제는, 사태 초기부터 국방부의 발표에 반대하는 주장(연평총각님)이 있었고, 수일이 지나면서
당사자인 어민들의 증언으로 볼 때, 국방부의 발표중 중요한 사실이 숨겨졌고 연평총각의 주장중
상당 부분이 사실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는 진상조사를 착수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공정한 진상조사의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국방부도 연평총각도 일방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선제공격을 받은 것이 사실이니 설사 조사 결과 우리 어민이나 경비정이 먼저 NLL을 침범했다
해도 그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물으신다면, 이것은 감정에 치우쳐 한수 앞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국방부의 발표를 믿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최악의 경우 북한측이 선제공격을 했다는 발표 자체가 거짓일 수도 있고, 북측 경비정이 선제공격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고, 우리측 경비정, 어선이나 북측 경비정의
사소한 실수로 오해를 빚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 그런 가능성도 부인한다고 하더라도, 만약 우리측이 먼저 NLL을 넘은 것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북한측이 선제공격을 했다고 하더라도 객관적인 시각에서는 우리측의 잘못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또한 NLL을 넘은 것이 북한인 것이 분명하게 밝혀지더라도, 북한 집권층의 의지가 아닌 군부나
일부 군 지휘관의 항명 문제였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북한측에서는 이번 사건에
대해 우리측 전체를 매도하기보다는 '남한 군부에서 도발했다'고 발표하면서 화해 무드의 지속을
바라고 있습니다.
MBC, 한겨레, 오마이뉴스(그리고 저도 포함해서)의 어느 기사에서도 어민들과 우리 해군의
책임이라고 하지 않았으며, 죽어도 쌀 짓을 했다는 얘기도 없었습니다.
누구도 해군 죽일놈 어민 죽일놈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일보, 오버하지 마란 말야!)
주장한 것은 오직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강경론이건 온건론이건 잠시 접어두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적에게 총맞아 죽었는데 죽은 우리편을 욕하냐" 하는 식으로 과장하여 감정적으로
대하지 말아주십시오.
어느 언론사의 게시판에서, 어떤 독자분이 이번 사건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와 비교하며 냉정한
대처를 촉구한 글을 봤습니다. 그러고보니 이번 서해교전 사건과 정말 비슷한 부분이 많더군요.
영화 "JSA"에서, 남북한 양측의 양보없는 주장 속에서 진실은 쉽게 밝혀지지 않습니다.
영화속에서도 우리측에서는 일방적으로 우리측의 입장만 두둔하면서 진실의 규명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번 서해교전 사태는, 영화속의 상황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분명히 사건은 일어나고, 남북한 모두 수십명 사상자를 냈습니다.
남측과 북측은 서로 상대방이 먼저 도발했다고 말하고 있고,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보는 오직
국방부의 신뢰가 덜 가는 '공식적인' 발표와 연평총각의 좀 더 믿을 만한 '비공식적인' 글 뿐입니다.
잠깐 눈을 돌려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과 파키스탄-인도의 경우를 봅시다.
두 경우 모두 국제적으로 수십년간 가장 치열한 분쟁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하지만 최근의 상황을 보면, 두 경우는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어느 편이 더 나쁘고 옳다는 얘기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경우에는 아직 극단적인 강경 대립이 전혀 해소되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이 중재하러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이유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대립상황은 거의 진전이 없습니다.
양측 모두 언제나 상대방의 공격이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진행되어왔다고 주장하면서, 한대 맞으면
두대 받아치는 식으로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져왔습니다.
파키스탄-인도의 경우에는 좀 다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최근의 카슈미르 지역 테러에 대한 인도측의 자제된 대응을 바탕으로 양국이 대화를 계속하며
전쟁 가능성을 낮추고 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지난 수십년간의 때리고 받아치는 분쟁의 역사 중에는, 분명 단순한 오해였거나
쌍방 과실에 의한 사건이 최소한 몇번 정도는 있었을 겁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경우에는 그런 가능성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상대방이 계획적으로 공격했
다고 주장해왔습니다.
반면, 최근 카슈미르에서 전면전으로 치달을 수 있었던 테러사태가 벌어졌을 때, 인도와 파키스탄
양측은 군대 전진배치를 자제하고 상대측에게 대화를 요청하는 등 슬기롭게 위기를 벗어났으며,
전화위복 격으로 카슈미르 문제에 대해 평화로운 해결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겠지만, 두 나라는 평화를 위한 첫 발을 밟은 것입니다.
이번 서해 교전은 정말 불행한 사태이고, 저또한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해군 장병 네명의 죽음에
정말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총을 쏜 것이 북한이니 진실을 규명하고 말고 할것도 없이 보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위험하고 어리석은 대응입니다.
얼마나 냉정하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이번 해군장병 네명의 죽음이 한층 더 강화된 대립 혹은
전쟁의 발단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항구적인 평화의 초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언론과 국민이 두 편으로 나누어진 배경의 가장 뿌리깊은 큰 문제는, 결국 북한을
'적'으로 보느냐 아니면 민족적인 '동반자'로 보느냐의 문제입니다.
북한이 적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이번 사건을 바라보기 때문에 전면적이고 계획적인 도발로만 보이고
'울분'이 거론되고 '응징'이 거론되는 것입니다.
적이 아니라 같은 민족의 이웃나라라고 보면, 북한 집권층의 계획적인 도발이기보다는 오히려
일부 세력의 반발 혹은 우발적인 사건일 가능성이 더 커 보이게 됩니다.
'적'이냐 '동반자'이냐의 차이는, 양측이 갖는 신뢰에 달려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고 있는 햇빛정책은, '무조건 퍼주면서 환심을 사자'가 아니라, 현상황을 양측이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으로 인식하고, 지속적으로 신뢰의 깊이를 더해감으로써 서로 동반자로서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이번 사건이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시행착오 정도의 문제일 뿐이라면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다소 더디게 진행되고 있긴 하지만, 남북한은 이미 화해의 첫발을 뗐습니다.
화해의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인 만큼, 더욱더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를 자제하고 냉철하게 진상을
규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화해의 과정이니까 무조건 북한을 이해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한나라당이 외치는 응분의 댓가 운운 하는 주장은 진상이 규명된 다음에 시작해도 결코 늦지 않습니다.
그사이에 우리나라의 압도적인 무기들이 녹스는 것도 아니고, 빨리 보복한다고 이미 죽은 장병 네명이
살아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보복을 한다해도 전쟁은 감정적으로 할 문제가 아닙니다. 제발 '울분'을 논하지 마십시오.
말씀하시는 당사자는 전쟁까지는 바라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런 '말'들이 모여서 전쟁 상황까지
악화될 수도 있으며, 실제 전쟁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그런 남북한의 첨예한 냉전 분위기에서 반사
이익을 누리게 되는 세력이 있다는 점도 잊지 마십시오. 울분을 토하려면, 순국한 해군장병 네명의
죽음을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측에 토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미국 국방장관이 '북한측이 월경했다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발표했더군요.
하지만 이런 미국의 발표는 조선일보의 보도보다도 더 믿을 가치가 없어보입니다.
911테러 당시, 빈라덴이 범인이라는 증거를 다수 확보했다고 발표한 후로, 그 증거들 중 대다수가
뻥카였다는 게 최근까지 밝혀지고 있으니까요.
오늘 합참에서 진상조사에 착수했다고 합니다.
사건직후 어선의 존재를 숨겼던 국방부는 여론에 떠밀려 계속적으로 발표내용을 수정하고 있습니다.
불법어로 어선은 1척뿐이었다고 주장했다가, 오늘은 '다수였다'라고 정정했더군요.
그런만큼 우리나라 군에서 자체조사를 하겠다는 것에 대해 신뢰는 별로 안갑니다만, 어쨋든 여론의
중대한 승리이며, 진상규명의 첫발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유엔사에서 북한측에 공동조사를 제안했다고 하더군요.
북한측이 적극적으로 응해주어서 원만하게 공동조사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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