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놀고 있으니까.. 뭐 그래도 때로는 아주 바쁠 때도 있습니다만, 짬짬이 책을 봅니다.
중학교부터 고딩때까지 6년 동안은 중독에 가까울 만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읽어댔는데..
대학교 진학 이후로는 책을 펼쳐볼 여유가 나는 때가 적어져서.. 더 정확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지요.
그래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습성은 그대로 있어서인지 신문이 굴러다니면 무작정 주워서 읽습니다.
요즘 짬짬이 보고 있는 책은 로마인 이야기입니다.
최근 몇년 사이엔 서점엘 들러도 IT 관련 서적이 아니면 아예 눈길도 주지 않아서 이 책이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베스트셀러라고들 하더군요. 그것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낀다나요.
한권짜리 단행본이 아니고, 현재 9권까지 나와 있고 10권은 집필중인 상태라고 합디다.
저자는 시오노 나나미라고, 일본계 아줌마입니다. 표지 안쪽의 사진을 보면 무척 인자해보이는 얼굴이네요.
놀기 시작한 직후에,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들 중 IT 서적이 아닌 책이 모여 있는 칸을 뒤적거리다가,
로마인 이야기라는 제목의 1, 2권을 봤습니다. 마나님께서 시집오시기 전에 보던 책이랍니다.
제가 책읽기를 좋아하기는 해도 역사 부분은 좀 잼없어하는데요, 아마도 그 삭막한 문체가 싫어서일 겁니다.
별로 기대는 안하고 펼쳤는데, 아뉘.. 상당히 재미가 있더군요.
역사를 사람 위주로, 그렇다고 앞에 돌출되는 영웅들만이 아닌 일반 대중의 마음까지 최대한 파헤쳐가며
풀어나가더군요. 내용 자체를 드라마적인 방법으로 풀어간 것도 아닌데, 너무나 생생한 묘사와 상황 설명으로
인해 정말 눈앞에서 그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물론 소설같은 것에 비하겠습니까.. 역사서로 기대하고 보기 시작했던 넘이 생동감이 넘치니까 놀라운
거지요.
지금까지의 느낌을 한마디로 설명하라면... 마치... 서양사의 삼국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단 두세대간의 사건들로 이루어진 삼국지와는 달리 천년 제국의 흥망을 설명하고 있으니
공간적인 스케일은 비슷하겠습니다만 시간적인 스케일은 비교가 안되는군요. 뭐, 등장인물의 수에서도요.
꽂혀있던 두권을 모두 읽은 후에 다시 3,4,5권을 주문해서 읽었고, 지금은 다시 6,7,8,9권을 주문해서
6권을 읽고 있습니다. 당연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성이 되어있는데요.
간단히 권별로 구성을 설명하자면..
1권은 로마라는 아주 작고 약한 도시국가가 처음 생겨서 기반을 닦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엔 왕정이었죠.
2권은 왕정이 무너진 후 귀족 위주의 공화정을 거치면서 로마가 강대국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입니다.
3권은 로마가 식민지와 영토를 넓혀가면서 공화정의 한계가 차츰 드러나고 있는 시기입니다.
4권과 5권은 카이사르(시저)의 시대 50년 정도에 모두 바쳐졌습니다.
6권은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가 황제로 발돋움하는 시기입니다.
7권부터는 아직 읽지 못했는데.. 제목만 보면 7권은 악명높은 황제들, 8권은 위기와 극복, 9권은 현제의
세기입니다.
4,5권이 모두 카이사르의 몇십년을 설명하고 있는데요. 카이사르 이전의 몇백년, 이후의 몇백년보다
카이사르 한사람이 그만큼 엄청난 역할을 했다는 얘깁니다. 로마의 세력이 전 유럽에 영향을 미치면서
비효율적인 공화정을 탈피할 필요가 대두되고, 그것을 가장 빨리 알았던 사람인 카이사르가 로마를 대대적으로
개조하는 작업을 시작했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에는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의
후계자로서 그 남은 일들을 마무리하면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요.
저자의 의견으로는, 카이사르는 처음부터 제정을 목표로 일을 벌였다는 겁니다.
(일반적인 학계의 의견일지도..)
어쨌든, 인물과 사건, 당시의 상황을 전혀 딱딱하지 않게 서술해나가는 문체에서 배어나오는 인물들이
생동감도 있고, 전혀 몇천년 전의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저자 스스로 이 책은 역사서가 아니라고
선언하고 시작했듯이, 스스로 느낀 과감한 역사적 가정들을 도입하는데도 주저함이 없습니다. 시원시원하죠.
그렇다고 역사적 고증을 등한시하면서 개인적인 의견으로만 일관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몇십년간을
이탈리아의 역사 탐구에 보낸 경험이 그대로 녹아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역사적인 사실에서 유추해볼 수 있는 교훈이랄까, 그런 것들을 독자들에게 툭툭 던져주는 것이,
마치 외할머니 품안에서 세상사는 이런 것이야, 하는 얘기를 듣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거의 거부감없이, 그래, 세상사는 그런 것이었군, 한수 배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간단히 말해서.. 대단히 매력적인 책입니다.
그런데.. 로마사를 다룬 책인 만큼 당연하긴 하겠지만, 로마의 영토 확장에 따른 식민지 관련 정책들을
서술하는 대목이 계속 반복해서 나오는데요. 이런 부분들을 읽으면서 종종 머리를 갸웃거리거나 혹은
인상을 찌푸리게 됩니다.
뭐, 스스로 역사서가 아니라고 한 만큼, 로마의 국가적인 정책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들이 거침없이 튀어
나오는 것이 이상하다고 할 순 없습니다만. 솔직히.. 제 느낌에는, 제국주의적인 사상이 너무 강해 보입니다.
물론 로마 이야기를 다루는 입장이니까 정복당하는 민족의 입장에서 충분히 생각할 의무는 없겠습니다만,
"피정복 민족의 입장에서는 로마는 고마운 구세주같은 존재이다"라는 뉘앙스를 지나치게 많이 풍기고
있습니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표현하기도 하구요.
역사는 항상 결과만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 결과가 바로 진실이니까 따지기도 곤란할 수도 있습니다만,
정복당한 민족 혹은 국가는 "스스로의 내분 혹은 부패로 인해 어차피 무너질 상태였다"와, "로마는 항상
국내의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해나왔다"는 논조가 계속되고 있더군요.
간접적으론 독자에게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우수성과 열등성을 비교하여, "처음부터 정복자가 될 민족"과
"어차피 정복당할 민족"으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정복된 민족은 로마의
지배 정책에 대해 오래오래 만족스럽게 잘 살았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지금 제가 읽고 있는 부분까지는요.
또 저자의 논조로 볼 때, 이후에 피정복 민족의 반란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복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일시적인 문제 돌출로 이해시키려 할 것 같습니다.
제 느낌을 요약하면.. 저자가 제국주의 합리화로 일관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수 민족 혹은 국가가 열등한
민족 혹은 국가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인데요. 이게 역사에 관한 책이니까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지만, 문제는 저자가 계속 현재의 상황에 로마를 은근히 비유하고 있어서, 현재에 있어서도
제국주의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이념인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계속 일방적인 호의로 책을 읽어오다 그런 느낌을 알아채고는 저도 깜짝 놀랐죠.
그것이 저자의 의도이며 스스로의 생각인지, 아니면 너무 현실감있게 풀어나가다 보니 얘기가 그렇게 흐른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좀 오바한다는 느낌이 들고 있습니다만.. 이 책을 계속 읽어오면서, 미국과 일본을 연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미국 주도의 평화", "세계 대통령" 과 같은 말이 나도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미국의 대외 정책은 고대 로마의 정책과 섬칫할 정도로 닮아있습니다. 미개한 민족에게 로마 문명을
전파함으로써 그 나라 특유의 문화위에 로마의 문화를 덧씌워 자연스럽게 로마화해버린다든지,
스스로 다스리기 난처한 나라는 정복하지 않고 압력을 넣어 로마에 호의적인 사람을 왕에 앉힌다든지,
그 외에도 무수히 유사한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다른 점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미국뿐 아니라 일본이 동아시아를 정복해나가면서 피정복 민족들에게 역설했던 당위론도 전혀 다르지 않지
않습니까.
저자가 일본인이라서 특히 제국주의에 호의적이지 않을까 하고 제가 의구심을 가진다면 너무 의심을 많이
하는 건가요. 저자가 이탈리아에서 오랜기간을 살아오긴 했지만, 그녀 역시 일본의 제국주의가 한참이던
1930년대에 태어나 가장 치열한 제국주의의 시대에 일본에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입니다.
그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면 오히려 거짓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화라는 것은 정말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한번 섬찟합니다.
저자 스스로 로마가 문명을 퍼뜨린 것이 가장 효과적인 식민지 정책이라고 수차 주장하듯이,
세계 각국에서 베스트셀러로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는 이 책 또한 스스로 정복자이지 못한 나라의 국민들
에게는 강대 제국에 복종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맘속에 심어주는
세뇌같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제국주의의 논리만은 대단히 멋있는 겁니다.
물론 거기에 피정복 민족의 민족성이나 자주성은 당연히 묵살되어야 하는 거겠지만요.
하긴.. 해방 후 일방적인 미국 찬양 일변도의 수십년을 지내온 우리나라 사람들, 좀 고위층이다 싶으면
너나없이 미국에 연줄을 대려고 하고, 좀 돈벌었다 싶으면 자식에게 미국 시민권을 주지 못해 안달인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제국주의에 대한 경각심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정부에서 역설했던 세계화라는 것도, 사실상은 미국화, 서구화가 아닌가요.
세계화가 제국주의와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세계화 이후 국가간 관계는 좀더 평등하게
발전해가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구요.
현대에 있어서 민족, 국가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제는 점점 희미해져가고 언젠가는 사라지게 될 구시대적
산물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세계화의 가장 핵심에 서 있으며 다민족 국가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국에서는 민족에 대한 차별이 없을까요. 범죄사실을 서술할 때 백인이 아닌 흑인과 아시아계만 민족을
들먹이는 미국, 스스로 민족이라고 내세울 것이 없는 넘들이 더하는 것 같습니다.
허, 책 몇권 읽으면서 별 희한한 생각을 다한단 생각을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
이런 생각들이 주저리 주저리 나는 것은, 저는 절대패권이라는 개념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9월 테러 이후로 많은 것이 변했지만, 미국 시민들이 왜 그렇게 개인 프라이버시에 집착하는지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들 스스로 세계 패권국가의 시민으로서 절대패권이 약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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