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에 병원에 다녀오면서 집사람과 함께 택시를 탔습니다.
열한시 정도였을텐데, 서해교전 소식이 뉴스로 나왔습니다.
저희 내외는 병원에서 오전 시간을 거의 다 보내느라 교전 소식을 그때 첨 들었지만, 기사양반은
계속 뉴스를 틀어놓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집사람과 저는 첨엔 이게 99년 뉴스를 녹음한건가 하면서 황당해했었는데, 곧 실제상황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잠시 듣던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기사양반, 뉴스가 끝나기도 전에 얼굴이 벌개지도록 흥분하면서
쌍욕을 쏟아놓더군요.
'대중이 개XX가 다 망쳐놨어, 햇빛은 XX 햇빛이야, 대중이 개XX하고 북한XX하고 똑같은 놈들이야,
탱크로 싹 쓸어서 다 죽여버려야 돼, 개XX...'
저도 결혼 전에는 놀만큼 놀았다고 자부했던 저인지라 웬만한 쌍욕에는 눈도 끔쩍하지 않습니다만,
몸이 불편해 병원에 다녀오던 집사람과 함께 듣기에는 정말 민망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무슨 전쟁에 한이 맺힌 듯 운전대를 마구 두들겨가며 광분을 하는 기사양반의 꼴은 정말
짐승도 그런 짐승이 없더군요.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내렸습니다.
여러분도 한대 맞았으면 그 이상으로 갚아줘야 한다, 앞뒤 가리지 않고 반드시 적함을 격침시켰어야
했다, 전면전도 불사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군사력도 북한에 앞서니까 일단 붙어보고 따끔한 맛을 보여주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현실에서의 전쟁은 영화에서처럼 관람의 대상이 아닙니다.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일상과는 빠이빠이입니다.
암만 우리나라가 군사력이 더 앞서더라도, 전면전이 일어나면 가진게 많은 만큼 잃을게 많은 것도
북한이 아니라 우리나라입니다. 전면전으로 확산되면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쌓아왔던 국가적인
산업기반은 대부분 날아갑니다. 출근할 직장이 폭격으로 날아가는 것은 다반사일 거고, 본인이나
가족이 죽거나 팔다리를 잃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든든한 미군이 지켜줄까요. 미국도 미국 나름의 계산기를 두들기면서 지금까지 한국문제에 개입해
왔던 거고, 전면전으로 치달은 한반도에 개입하는 것이 미국에 이익일지 불이익일지는 예측불가입니다.
또, 설사 미국이 적극 개입해준다고 하더라도, 미군의 전면 참전이 한반도 상황에 도움이 될지
아닐지도 역시 예측불가입니다. 그들만의 계산대로 전쟁을 끌고 갈 것이니까요.
미국의 입장에서는 남한이 완전히 초토화되는 상황이 뻔히 예측되더라도 북한을 섬멸시키겠다는
결심을 하기는 아주 쉽습니다.
한나라당과 조선일보에서는 며칠째 군의 미온적인 대처에 대해 극단적인 비난을 하면서 강경대처를
주문하고 있습니다. 토욜날 만났던 그 택시기사보다 나을게 하나도 없을 정도입니다.
모 의원은 국회에서 노골적으로 전쟁해보자, 하고 떠들어댔다고 하더군요.
전면전이 우려되어서 격침까지 지시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전면전이 우려되어서 공군력을 투입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국민들을 수호하는 군의 책임을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결정 아닙니까.
우리나라 군대가, 누가 때리면 그만큼 받아치면 그만인 조폭 집단입니까.
물론 전면전이 무서워서 무조건 벌벌 떤다면 그또한 군으로서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해군 네명의 복수를 하겠다는 감정만으로 섣불리 전면전을 벌였다가 수십만명이 죽으면
그것은 더욱더 말도 안되는 일이겠죠. 군을 일방적으로 비난만 할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정치가나 언론사 간부쯤 되니까 전면전이 일어나도 한걸음 뒤에서 전쟁을 관람한다는 기분에서
함부로 떠들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그들도 우리 서민들과 함께 소총
들고 총알받이가 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그런 말을 내뱉는 것일까요.
지들 자신과 아들들이 소총을 들 자신이 없는 한, 한나라당과 조선일보의 강경대처 주문은 어이없는
말장난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번 교전으로 아까운 젊은이들이 넷이나 죽었다는 것에 대해 저도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아래 글처럼 아직 사건의 실체가 덜 밝혀진 부분도 있는 것 같고..
그렇지 않더라도, 조폭 나와바리 싸움이 아니라 사천칠백만 국민들의 운명이 달린 문제인 만큼,
신중하게 대처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판에 한판 벌여보자 식의 논리를 앞세우는 기막힌 기득권
세력이 하도 답답해서 글을 써봤습니다.
더욱이, 왜 전투원인 해군 네명의 죽음이 민간인에다 미성년자였던 여학생 두명의 비참한 죽음보다
더 크게 부각되어야 하는지 언론사들의 보도 행태가 안타깝고 분노스럽습니다.
미군 장갑차에 여중생이 깔려죽었을 때는 먼나라 해외토픽처럼 흘리고 말더니, 북한과의 전투에서
군인들이 죽으니까 "아까운 젊음이 넷이나 산화..." 어쩌구하면서 떠드는 것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단지 여중생 둘보다 해군 넷이 산술적으로 많기 때문에 훨씬 더 안타까운 일이 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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