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이 모두가 행운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스스로 노력해도 안되는
일들이 천운으로 이뤄집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월드컵'이란 축제를 만난 것이 그렇습니다.
특별히 운좋은 사람들이 있다
역사의 광장을 만날 수 있던 특별한 세대들이 있습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거리로 뛰쳐나왔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들, 1960년 이승만 독재에 항의하며 총칼을 겁내지 않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4.19 세대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학생들과 시민이 함께 어깨 겯고 행진한 87년 6월항쟁...
이들 역사적 공간을 만난 이들은 '우리세대의 행운이었다'고 술회합니다. 이들 모두가 이들 역사의 한 날을 '회심의 결정적 날짜'로 삼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이 역사의 광장을 만난 이들중 상당수는 자신을 형성하게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계기로 이 '광장의 체험'을 듭니다.
더욱이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는 사춘기, 청년기에 이들 역사적 사건을 만난 이들에게 '역사적 광장'의 영향력은 엄청납니다. 결국 그 역사적
광장은 그 즈음의 청년 세대를 한마디로 규정하는 말이 되다시피 합니다.
해방둥이(사실 이말은 45년에 태어난 이들을 자칭하지만...), 4,19세대, 386세대....
여러해전 '몸은 80이지만 마음은 20대'란 말 대신 '마음은 박남정인데, 몸은 김정구'란 우스갯소리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누구랄 것 없이
"마음만은 젊은 오빠요, 10대 소녀"인 게 나이를 들어가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한탄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인생의 꽃다운 시기에 두고자 하는 게 본능적이랄 수도 있지만, 인생에서 특별한 한 시기에서 결정적 회심을 하게 되어 그
순간을 자신의 정체성 자체로 인식하게 되는 이 많습니다.
여러해 전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씨는 "난 1960년 4.19일 이후로 한 살도 먹지 않았다"
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한 문학평론가의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스무살 언저리에 4.19를 체험한 세대가 그 이전-이후 세대와 확연히 다른 집단적 의식을 한 마디로
압축한 것이란 생각입니다.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87년 6월항쟁을 비롯해 80년대 반독재 투쟁을 한 청년세대들은 스스로를 '386'이라 부르며 자신들의 정체성이 '반독재 민주화투쟁'이란
역사적 광장에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80년대 세대들의 행복과 불행
80년대를 체험하지 않은 이후 청년세대들이 80년대를 청년기에 맛본 세대에 대한 감정은 이중적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풍요로워져 해외
배낭여행들을 꿈이 아닌 현실로 만나는 모습만이 이들을 풍요롭게 해주진 못했습니다. 90년대 학번들이 80년대 학번들에 대해 가졌던 아쉬움은,
80년대가 주었던 역사적 광장을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습니다.
민주화투쟁이 목숨을 내놓는 것과 동일시되던 70년대에도 면면히 대학가 등에선 긴급조치 위반자들이 있었고, 90년대에도 쉼없이 다양한 차원의
민주화운동 참여자가 이어지긴 했습니다만, '역사의 광장'으로 이어지진 못했습니다.
'역사적 광장'이란 각별한 공간을 만나는 것은 개인의 노력에 달린 게 아니라는 점에서 2002년 월드컵 한국개최를 맞는 이 땅의 청소년들이
특별히 운 좋은 세대입니다.
이번 월드컵 대회가 비단 청소년에게만 '내 인생의 월드컵'이 되란 법은 없지만, '광장'과 '축제'를 경험하지 못한 청소년들이 '결정적
시기'에 만난 '우리 역사상 최대규모 축제의 광장'을 만난 것은 이들의 행운입니다.
오늘자 <한겨레 논단>에 실린 도정일 교수 글의 취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겨레 논단] 지금은 축제의 시간/ 도정일
경기가 끝난 뒤.....거리응원단의 표정
이곳 게시판엔 거리에서 '축제'를 체험한 이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올라와 다양한 반응을 부르고 있습니다.
[필독]어제밤 거리에서 서울 강남 스케치(강남맨)
강남의 풍경에 이어 광화문, 시청, 신촌, 홍대앞, 압구정등 서울 곳곳을 비롯해 다양한 곳의 응원현장이 어떠했는지 '거리응원단'들의 보고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시청에서는 요...(아쟈~8강)
홍대 앞에두 난리였어여 ㅡ.ㅡ; 강남분위기랑 비슷한듯(한국화이팅)
전주에서...(비니루)
강남역에서 조금 떨어진 압구정에선,,(압구정)
광화문 근처 회사원의 광화문 연가(딩크 짱)
어제 신촌 (불근앙마)
버스 지붕 위 붉은악마의 '반성문'
'버스 지붕 위에 올라타고 낯모를 운전자의 트럭에 오토바이에 올라타' 열광적 응원을 한 '붉은악마'의 '무용담 혹은 반성문'도 게시판에
올라왔습니다. (17일자 <한겨레> [함께 뛰는 네티즌 코너]에 아래와 같이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함께뛰는네티즌] 열광적 거리응원 참여자의 `반성문'
미국전부터 시청 앞에서 붉은악마가 되어 응원하기 시작하였는데요, 아직까지도 목이 쉬고 후유증이 쩜 가네요.
포르투갈전 끝난 뒤 국세청 바로 앞에서 트럭 아찌, 정말 죄송함다. 괜히 제가 올라가서 아찌의 경제적 손실이 있었던 건 아닌지.
그래도 빠빠빠~ 빠빠!! 경적소리 리듬박자 모두 좋았슴다! 글고 금강제화 앞에서 오토바이 아찌한테두 죄송스럽네여. 괜히 뒷좌석에
올라가서 태극기 흔들고 박수 유도하구. 역시 아찌두 경적의 리듬 박자 모두 심플했슴다. 또 종로3가에서 시내버스 아찌(경황이 없어서
번호는 기억을 못했슴다) 이제부턴 버스 위에 안 올라갈게여. 죄송함다. 지하철공사 관계자분들, 어떤 차량인진 모르겠지만 앞에서
네번째칸 문 위에 노선도 옆 광고판 한번 점검해 보세여. 지하철 안에서 노래부르고 박수 유도하느라고 쩜 두드렸는데 찌그러진 듯. 이거
끝이 없네. 영등포 경원극장 가는 골목 사거리에서 엘란 뚜껑 열고 아가씨들 태우고 경적 울려 주시던 분 죄송함다. 괜히 운전석 옆 문
위에 걸터앉아 마치 제 차인 양 아니 모터쇼 나레이터인 양 행세했던 거 용서해 주세여.
마지막으로 서울시청, 중구, 종로구 그밖에 행사 뒤처리에 힘써 주신 분들께 죄송함다. 자랑은 아니지만 큰 쓰레기는 제가 응원했던
시청 앞 명동방면 전광판 앞 일곱번째 줄로 모으도록 주변 붉은악마들에게 유도는 해놨는데여.(제가 롯데영등포 주차지원팀에서 유도를 하고
있는 관계로) 신문지 조각이나 조그만 쓰레기는 정리를 못했슴다! 행사 끝나고 뒷정리하시느라 정말 고생하셨구여, 수고하셨슴다!
이탈리아전에는 깨끗이 정리하고 갈 수 있도록 노력할게여. 정말 여러분들께 `범국민적 열광'이라는 미명 아래 폐를 끼쳐드린 것 같아
죄송하기 그지없구여 송구스럽슴다. 부디 너그러운 아량으로 용서해주시길 빌어빌어 부탁드림다.
마지막으로 축하해 주세여. 미국전 하루전날 손을 다쳐서 왼손에 붕대를 감고 응원에 참석했었는데 오늘부터 붕대를 풀어도 된다네여.
이제 두손모아 짜짝짝~짝짝 할 수 있슴다!! 또 하나 응원을 열쉬미 해서인지 자리가 좋아서인지 티비로 저 봤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네여. 자랑할 만한 얼굴은 아니지만 국민적 열기의 선봉에 선 듯해서 기분 하난 좋네여.(아이사커 게시판에 아이디
`롯데영등포주차팀'으로 올라온 글) |
본디 게시판 글 : 한국-포르투갈 경기 끝난 후 우리의 행태!!(롯데영등포주차팀)
우리 사회가 처음 만나는 디오니소스
버스와 트럭뿐 아니라, 폭주오토바이도 지프차도 컨버터블 무개차도 모두 태극기를 내걸고 하나되어 축구국가대표팀을 응원하고 함께 목청껏
'필승~코리아'를 외쳤습니다.
18일 한국과 이탈리아의 경기엔 아직껏 광장과 축제를 체험해보지 못한 이들이 아쉽지 않은 '내 인생의 월드컵'을 가슴에 품을 수 있기
바랍니다.
아폴론적 질서만 말해지던 우리 사회에 디오니소스적인 흥과 영감이 저절로 넘친 풍경입니다. 이제껏 우리 사회가 만나온 8.15, 또
4.19나 6월항쟁의 광장이 아폴론적 광장이었다면 이번 2002 월드컵은 처음 만나는 디오니소스적 취기의 광장이기도 합니다.
<인터넷한겨레> 뉴스부장 구본권 starry9@new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