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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나누는 사랑방입니다.
[2902] [시] 오후는 이파리처럼 쌓여 - 이기철
박정모 [] 2404 읽음    2001-12-22 01:12


내가 건너온 물은 맑았다
그러나 그 물을 건너간 세월은 흐렸다
나는 그 두꺼운 시간을 고배처럼 마시며
그 여름과 겨울을 몇 번 옷 갈아입으며 지나왔다
세월 속에서 꽃은 피었다 시들었지만
내 머물렀던 자리
그 주소들은 해독되지 않았다
그 집들은 모든 기록에서 누락되었고
그곳에 핀 꽃들의 이름을 불러주기에는
나의 언어가 빈곤했다
그 많은 햇빛들은 낮이라는 말로 짧게 불렀듯이
그 모든 것을 삶이라는 말로 나는 무례하게 요약했다
명명할 수 없는 오후들이 이파리처럼 쌓여
내 발을 덮으면
나는 인생이라는 긴 문장 속에 그들을 가두어놓고
제독처럼 술 마셨다
꺼내 읽을 추억들을 쌓아놓은 내 시간의 시렁 위에
세월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나갔다
영혼은 늘 굽은 길과 급한 경사를 바퀴처럼
미끄러져 갔다
나는 사랑 지상주의였으나
세상을 알고 난 뒤 아무것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오래된 주소록에서 내가 만났던
몇 개의 삶들을 지웠다
강물은 출렁였고 세월은 침묵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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